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문단 편집) === 종교개혁의 시발점 === 사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봐야되는지는 논란이 있긴 하다. [[중세]] 초기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 모습이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부패하여 있던 것은 크게 이견이 없고[* 존 줄리어스의 교황연대기를 보면 [[르네상스]] 시절 막장 [[교황]]들보다 11~12세기 시절이 더 타락했다 평가한다. 10세기의 창부 정치시대는 여인천하 왕좌의 게임 실사판이었고, 요한 12세처럼 별의별 엽색 행각과 전쟁으로 반대파의 코와 손가락을 자르는 막장인도 있었다.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B0%BD%EB%B6%80%EC%A0%95%EC%B9%98|창부정치]]항목 및 해당 시기의 교황들 중 일부인 [[세르지오 3세]], [[요한 10세]], [[레오 6세]] 문서 참조.], 성직매매, [[수도원]](수녀원)의 타락, 교회의 세속권력, 가톨릭교회가 사회 현실과 타협한 여러 풍습등의 문제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이기 때문에 15~16세기의 개혁가들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부패상을 [[가톨릭]] 신자들이 손놓고 바라본 것은 아니다. 중세 이전부터 교회 구성원들이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그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원]] 운동이 개혁의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심지어 [[루터교회]]가 출현하던 시기에도 [[수도회]]들의 쇄신 운동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존경 받는 쇄신운동가이자 [[성인(기독교)|성인]]들인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성 후안 데 라 크루즈)은 이 시기 스페인에서 배출한 개혁가들이다. 데레사와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했다. 물론 루터의 출현은 순수하게 우발적 사건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으며,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개혁을 위해 나타난 [[수도원]]들도 조직화되어 가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지기도 하는 등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거기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과 [[교황청]]도 100여 년간 [[아비뇽 유수]] 시절과 분열시기를 겪으며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아래 인용은 이처럼 '교회 내부의 부패에 대한 정화'라는 측면에서 종교개혁의 시발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적어도 부패의 정화라는 측면에서 종교개혁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며 점진적인 개혁의 결과에 가깝다. >우선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실제로 '종교개혁' 따위가 있었는가? 이 표현이 가리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독교 내부의 '개혁' 요청은 이 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매 시대마다 기독교를 시급히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중략) 루터 이전에 숱한 개혁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연관된 종교개혁에 정관사를 붙이고 'r'을 대문자로 바꾸어 'the Reformation'이라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다. 단수(單數) 종교개혁(옮긴이 주: 가톨릭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단 한 번 있었다는 관점)에 관한 옛 교과서들은 으레 1517년에 루터가 항의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하고 길어야 10년 남짓 지난 시점에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사건으로 보였고(잉글랜드 같은 다른 곳에서도 중요한 반향이 일어나긴 했지만), 서사 형태가 깔끔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이유로 루터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뒤이어 [[독일]] 가톨릭교도 황제의 뜻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들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었고,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교회의 무질서한 상태를 감안하면) 예측 가능했다. (중략) >이제 이런 단수 종교개혁의 연대기도 지리도 더는 설득력 있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불가피했다'는 가정은 중세 후기 가톨릭교의 유연성과 정신적 활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를 고려하면 적어도 논박이 가능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때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였던 것 ―독일에서 전개된 루터의 운동―이 실은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이제 학계에서 두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중략) > 그 이전까지 종교개혁에 관해 쓴 이들은 (그리고 오늘날에도 놀랄 정도로 많은 이들은) 테베라 강의[* [[이탈리아]] 중부를 흐르는 강으로 [[가톨릭]]을 가리킴] 이런 견해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책 뒤쪽의 부수적인 장에 우겨넣었다. 그러나 점차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쇄신'이라 알려진 것은 단순히 적에 직면하여 방어시설을 보강한 대응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운동이었다. 신교 반란에 앞서 가톨릭교 내부에 이미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신적 동향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신교 반란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다른 일부는 그러지 않았다. >---- >「The Reformation」, Peter Marshall[* [[영국]] [[워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근대 초기 영국과 [[유럽]]의 종교사 및 문화사를 주로 연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